레이블이 수필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수필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1년 12월 7일 화요일

나에게 여행이란

나와 남편의 현재 사는 모습은 남에게 보여 줄 거리는 없는데 우리는 충분한 만족감을 느끼고 산다.  어떻게 이 나이에, 이 자리에, 이런 모습으로 살게 되었는가 되돌아보면 여행들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떠났던 나나 보냈던 남편이나 여행들을 통해 많이 달라졌던 것 같다.

병원 통역 일을 하면서 많은 한국분들을 만났는데 가끔씩 기다리는 시간에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여행 얘기가 나오면 내 생각과 상대의 생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혼자 여행하는 걸 알게 되면 데려가 달라는 여자분들도 많았고 어떤 남자분은 다음 여행에 자기 부인을 꼭 좀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받은 적도 있다.   

내가 여행을 결정할 때에는 그 때마다의 목적이 달랐다.  음식을 배우기 위해 가기도 하고, 문화나 사람들이 궁금해서 가기도 하고, 편안함에 빠져 있는 나 자신을 건져내기 위해 가기도 하고, 도전하는 마음으로 부딪혀 알고 싶은 대상이 있어서 가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가이드로 가기도 하는 등 매번 출발하는 이유들은 달랐지만 공통적으로 내 자리에 돌아오면 그만큼 달라진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도착 직 후 느낀다기보다는 살면서 소소한 선택들 속에 배어있는 변화를 느꼈다.  나 자신뿐 아니라 남편도 느꼈는지 나의 여행을 적극적으로 서포트했다.  그러면서 함께 변화해 온 것 같다. 

여행 하겠다고 길을 나서면 온통 새로움 뿐이다. 다양한 환경에 부딪히며 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는 중에 나의 호기심은 늘 사람에게 있었고 사람들과 엮길 기회를 항상 기대하면서 다녔다.  사람들을 통해 만나는 삶의 다양함에는 늘 배울 점들이 있고, 깊이 공감되는 사람들을 만나면 가슴이 뜨거워지며 오래 오래 그 분들을 붙들고 싶었다.  나의 원함이 그런 기회들을 끌어왔는지 그 많은, 소중한 만남들은 오로지 나 만의 경험으로서 나 자신의 일부가 되었고 새롭게 다가오는 미지의 하루 하루 속에서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느낀다.    

나에게 여행이란 낯선 대상을 편안한 대상으로 바꾸는 그 과정이다.  두려움이 항상 동반되는 낯섦에서 출발했다가 어느 정도 알게 되면 대상에 대한 내 맘이 편안해 짐을 거듭 경험했다. 그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장소일 수도 있으며 물건이나 문화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대상이냐는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 과정을 겪는 동안 편안함 속에서는 만날 수 없는 나 자신의 새로운 모습들을 또한 만나게 된다.   편안해서 매달리고 싶고, 싫어서 피하고 싶고, 좋아서 더 하고 싶고, 거북해서 빨리 피하고 싶은 다양한 대상들에 대한 내 감정들을 경험했다.  지금도 그 여행들을 머리에 떠 올리자면 눈으로 본 것들에 대한 기억은 삼삼하지만 감정들은 그 때 그대로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에게 여행은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돌아올 때까지의 모든 새로움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행을 결정하고 나면 코스를 정하고 비행기 좌석 예약을 끝낸 후 준비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한달 전부터 가이드 북을 꼼꼼이 읽고 들고 다녔는데 이제는 많은 정보없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그 곳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다니는 편이 더 좋다.   사람들에게 의존하면 그 곳 사람들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데 한번은 딸과 바르셀로나를 가면서 내가 제안했다.   비행기만 타고 가서 모든 정보를 사람들에게 의존해서 바르셀로나를 경험해보자고... 비행기에서 내리면서부터 묻기 시작했는데  딸은 지금도 그 때 만났던 사람들 얘길 꺼내고 함께 웃는다 .    부엌에 있는 냉동실의 일부를 비우고 남편이 먹을 음식으로 채우기 시작한다.  도시락을 챙겨야 했기 때문에 1인분씩 통통이 담아 여러 가지 음식들로 꽉 채운 후 내 짐을 준비한다.   직장 다니며 챙김을 받다가 혼자 챙겨야 하는 변화가 불편할텐데도 남편은 나에게 이런 기회를 선물하는 기쁨으로 싱글벙글이다.   

3년전인 2018년 늦가을에 뭔가 낯선 것에 부딪히고 싶은 욕망이 절실해서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던 베를린 여행을 결정했다.  가는 김에 북쪽으로는 세계에서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사람들이 산다고 하는 코펜하겐을, 남쪽으로는 독일 외곽을 거쳐 맥주가 그렇게들 맛있다고 하는 Czech Republic의 프라하를 추가했다.  이 여행을 결정한 이유로는 베를린을 통해 근대 역사를 현장에서 돌아보고 현재 베를린 젊은이들의 창작 열기를 보고 싶은 호기심외에도 58세에 혼자 떠나는 배낭 여행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떻게 경험하게 될 지가 더 궁금했고 이 나이의 나를 대하는 세상을 만나고 싶었으며 스마트 폰없이 테블릿 하나로 여행이 아직 가능한 지도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런 스타일의 여행으로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몇가지 원칙도 세웠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되도록이면 해보자. ---세 도시에서 한번씩 couch surfing을 하되 누구를 막론하고 나를 받아주는 첫 집으로 무조건 간다 등등.    그 후에 터진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이젠 진짜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이 여행에서 이 원칙들이 정말 값진 경험들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여행이 마무리 될 쯤에는 여행을 통해 내가 얻을 것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느낌과 함께  이제는 내 삶을 만들어가는 나 자신과 좀 더 깊은 관계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어만 귀소 본능을 가진 게 아니라 나에게도 있는 것 같다.  세상을 돌고 돌아 돌아온 내자리가 이제는 내가 있을 곳이라는 생각이 가슴에서부터 올라왔다. 그 나이가 되었나보다.

요즘에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족들을 위해 만들었던 음식들을 가끔씩 다시 만들어 본다.  그 때 맛있게 먹었던 그 음식들을 다시 만나며 그동안 변해온 나를 새삼 느낀다.  또한 기회를 만들어 로컬을 벗어난 Day trip같은 여행도 하지만 매일의 일상 자체가 이제는 여행처럼 느껴진다.  산책중에 헬로우하며 지나치는 사람들의 미소들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고 장을 볼 때나 중고 가게에서 만나는 친절함, 새로운 것들을 느끼는 반가움등등이 집을 떠나 여행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음식과 잠자리, 샤워가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는 여행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은 상황을 대하고 두려움으로 맘이 불편할 때면 처음이라 그런 줄을 알아차리고 그 또한 익숙함으로 바뀌리라는 것을 익혀 배워왔기에 그 두려움을 옆으로 살짝 비켜 놓고 새로움을 향해 그냥 뚜벅뚜벅 가려한다.   


2021년 12월 6일 월요일

환갑이 된 실내 화초

 

지금 서른 둘인 딸이 어렸을 때 알라스카로 이사 가시는 분의 며느리를 통해 이 화초를 어쩔 수 없이 받아 오게 되었다.  그 때 벌써 시어머님이 몇 십년 키웠다고 들었고 내가 27-8년 데리고 있었으니 환갑이 거의 되었거나 넘었을 수도 있겠다.  사실 나는 실내 화초에 애정과 관심이 별로 없다.  문만 나서면 식물들이 많은 지라 굳이 집 안에 까지 들여와 신경 쓰며 키울 정도의 식물에 대한 애정은 타고 난 것 같지 않다.  특히 겨울에 난방을 나무 때는 스토브에 거의 의지하기 때문에 불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기온 차이로 식물들이 힘들어 할 줄 알기 때문에 실내 화초 키우기는 미리 포기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 긴 세월동안 화분과 흙을 한번도 갈아주지 않았고 거름도 준 적이 없고 물 주는 것도 잊고 살다가 어쩌다 한번씩 주는 데 미안한 마음에 한달에 한번은 챙겨 주자고 물 주는 날짜를 써서 화분에 달아 놓았건만 그 조차 들여다보기를 잊고 있다가 생각 나서 보면 1달 반이 후딱 지나갔고... 거기다 둘 곳이 마땅치 않아 나무 때는 스토브와 가까이 있으며 잎들이 겨우 내다 보는 창은 북향이다.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 다닐 때 내가 일을 너무 하고 싶어 남편을 졸라 아이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구해 2년간 양쪽 집 생활을 했는데 난 일주일에 한번씩 컴포스트만 챙겨오고 집에서 생활 하지 않아 가을부터 봄까지 히터가 없는 냉골에서 물도 없이 버틴 화초이다.  잎들이 누렇게 마르면서 하나씩 떨어지고 끝에서는 또  새 잎들이 나고 하면서 긴 목을 가지게 되었다.  

몇 해 전부터는 찐득한 액체를 뿜어 내기 시작했다.  그 마저도 그냥 두었더니 화초 옆 유리들은 뿌엿게 코팅이 되었고 카페트와 가구들까지 끈적끈적한 물질로 뒤덥혔다.  더 이상 내버려둘 수 없어 잎들을 닦아주기 시작했는데 닦으면서 보니 잎에 뭔가가 덕지덕지 붙어 식물의 진을 빨아먹고 있는 듯 했다.  자세히 보니 움직이는 벌레는 아니고 잎의 중심 줄기를 중심으로 줄기를 따라 줄줄이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영양이나 물을 도둑질하는 존재들이 분명했다.  그 놈들도 어린 것부터 어른까지 모습이 다양한데 처음 자리 잡는 모습은 아주 얇은 종이같아 그 존재가 잘 보이지 않다가 점점 갈색이 돌면서 확실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크기와 두께들도 달라 그 놈들의 연륜도 보였다.   그 때서야 왜 끈적한 물질을 쏘아댔는지 이해할 듯 했다.  미안한 마음으로 잎들을 하나하나 닦는데 자가 면역 질환이란 용어가 머리에 떠 올랐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생기니 나름 방어 대책으로 끈적한 물질을 뿜어댔는데 그것 때문에 잎들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위에 딱딱한 막이 생긴 것이었다.  그 방어 대책이 침략자들은 막지 못하고 그대로 두면 자신이 병들게 된 셈이다.  

그 애절함을 닦아주면서 앞으로는 내가 잘 보살펴주겠다고 약속에 약속을 화초에게 하고 일주일 내내 빠진 곳이 없는 지 보살폈다.  처음으로 캄포스트도 흙위에 한켠 뿌려 주었다.  며칠있다 보니 캄포스트에 섞여 들어온 씨들이 싹을 틔웠는데 또 며칠 후 보니 모두 말라 죽었다.  그 아이들 살리자고 안 주던 물을 자주 줄 수도 없는 노릇.  노장은 지금까지 익숙한 방식으로 앞으로도 계속 돌볼 것이다.  단 더 이상 힘겨운 싸움을 하지 않도록 자주 들여다 봐 주면서 잎도 자주 닦아주고...

이런 care 없는 care 속에서 버티어 온 이 화초는 이제 내가 존경하는 식구이다.  가끔 다른 분들이 가지에 뿌리를 내려 길이를 짧게 해주라고 제안하는데 나는 이 아이의 60년(?)  투쟁 역사를  그대로 두고 미안한 마음을 느끼며 함께 있고 싶다.  긴 목은 문제되지 않는다.  사진에는 램프에 기대고 있는 것 같지만 아니다.  긴 목은 단단하고 힘이 있어 혼자 서 있는데 아무 도움이 필요치 않다.  

이 노장은 나에게 식물의 적응력과 살아내는 힘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었고 지금도 건장하다.  어쩌면 나 또한 그걸 알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2021년 11월 30일 화요일

정년 퇴임하다

 난생 처음으로 정년 퇴임이라는 경험을 10월 중순에 하게 되었다.  58세로 작년에 이미 퇴임한 남편 곁에서 쥐꼬리만한 수입이라도 내가 벌고 있다는 사실이 매달 감사했고 파트 타임으로 하는 병원 통역 일을 너무나도 즐겼기 때문에 오히려 이 일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가 걱정될 정도로 일도 즐기고 돈도 벌면서 내 자신의 생활도 다 할 수 있다는 충족감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다가 10월 중순, 사회의 많은 변화 속에서 일을 그만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한 달 모자라는 61세에 돈 버는 일을 그만 두었다.  언젠가부터 이런 외부 조건의 흐름에 맞춰 내려야만 하는 결정들은 매번 새로운 문을 열어주고 그 변화들에 의해 내가 지금까지 성장해 왔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일단 선택하고 삶에 맡겨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아쉬움이 좀 남아 온라인이나 전화 통역 할 계획은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사흘 놀면서 보니 삶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  일터에 가야 하는 시간 챙김이 없어지고 나니 무한한 여유가 가슴 속에 좍 깔리면서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소소하지 않고 손이 하는 모든 일들이 섬세하게 느껴지며, 과정들이 더 잘 보이고, 배움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삶과 내가 함께 있음을 처음으로 깊이 느끼게 되었다.  감사함이 더 크게 느껴지고 우선 순위도 달라졌다.  큰 선물을 받은 것이다.  인생 마지막 장의 첫 출발에 이 선물의 존재를 받고서야 알게 되었다.  

통역 에이젼시들에게서 계속 이멜들이 오지만 이제는 한 치의 미련이 없다.  지금까지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렇게 살아왔고 이제는 다르게 살 때가 되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나에게 다가 올 하루 하루를 서두름없이 삶과의 좋은 관계로 채우고 싶다는 바램 뿐이다. 😄

Comments: 

퇴임- 눈에 확 들어오는 소식이군요. 보람된 삶을 살아오신 분 같아요. 퇴임을 이렇게 설레고 희망적으로 쓰시다니요!  

저희도 남편이 내년 여름이면 은퇴를 합니다. 제가 은퇴 당사자는 아니지만 여러가지 생각이 왔다갔다하는 요즈음이예요.

omicron covid.. 더 강력한 변종이 온대륙을 뚫었다는 뉴스에 종일 답답하다가 문득 숲에서 6일을 지내다 오셨다는 대목을 읽으면서 와 정말로 놀랐답니다. 👏🏻 👏🏻👏🏻 
저도 부산 출신이고요, 군데군데 반가워하며 글을 읽는 중입니다. 힐링이라고 하죠? 쓰신 글들이 저한테 그러네요. ㅎㅎ
고맙고 좋습니다. 다시한번 퇴임을 축하드리고, 하루하루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서울에서 정혜숙


2008년 12월 18일 목요일

보익씨, 은희씨 위해 콘지(congee) 만들다/레시피

필라델피아에서 오셔서 생기와 즐거움을 잔뜩 선사하고 가신 보익씨와 은희씨 감사드립니다. 별스럽지도 않은 국 한그릇에 쏟아주신 찬사와 그 국을 이유로 다음 날 아침, 시애틀 앞 바다를 옆구리에 끼듯 곁에 하고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곳곳에서의 대화도 딸의 진로 결정에 큰 도움이 되고 즐겁웠지만 독수리 5형제 얘기는 특히 신선했습니다. 다섯 분 장년 남자 분들로 구성된 중창단으로 4부로 노래를 시작했다가 잠시 후면 1부로 모아진다는... 그렇지만 끝까지 열심히 부르는 한사람 한사람의 모습이 즐겁게 머리 속에 그려지거든요. 무대가 아닌 가정에서 제가 청중이라면 가수처럼 멋지게 부르는 노래보다 독수리 5형제의 노래를 듣고 싶은 갈망이 훨씬 강하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부족한 것을 남 앞에 내 놓을 때 큰 용기가 필요한 법, 그런 용기는 제가 늘 그리는 이상적인 사회의 희망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린 늘 '1등'을 갈망하고 무엇이든 남과 비교해서 더 잘 해야만 남 앞에 내 놓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능력과 노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만 문제는 직장 일외 삶의 구석구석에 상대적 비교 심리가 압도적이라는 점이지요. 크고 멋있는 내 집에 손님을 청하면 뿌듯한데 작고 보잘 것 없는 집에 청할 때는 용기를 내야하고,정돈되지 못한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면 내 능력의 부족함을 내 비추는 것 같아 맘이 내키지 않고,잘 손질된 외모로 나설 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낡은 차는 부끄럽고,못 부르는 노래는 창피하고,못 그리는 그림은 절대 남에게 내 놓고 싶지않은..... 저는 언젠가부터 각자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비중이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잘하는 점이 있으면 못하는 것도 있고, 넉넉한 부분이 있으면 부족한 점도 있고, 타고난 능력은 뛰어난데 성격이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등등 결국 장, 단점을 숫자로 바꾸어 빼고 더한다면 대개 마지막에 나오는 숫자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지요. 주어진 능력과 환경뿐 아니라 거기에 반응해서 살아가는 태도까지 보태면 변수는 더 다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주어진 삶이 힘들면 강하게 사는 법을 얻게 되고, 아프다보면 건강을 챙기게 되고, 슬픔을 겪으면 아픔을 이해하는 더 큰 마음을 얻게 되고, 집착을 버리면 자유로움을 얻게 되고, 삶이 편안하고 넉넉하면 체험으로 얻어지는 것이 별로 없는 경우들을 통틀어 적용하면 결국 사람들의 삶이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지요. 1등이라고 내 세울 것 없고 꼴찌라고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만큼 우리의 생각속에서 비교하는 마음을 없애버리고 오히려 남과 다른, '나' 나름대로의 삶들이 당당하게 어울어진 그런 사회가 그립습니다. 그런 면에서 독수리 5형제의 당당한 모습은 멋진 음악의 감동보다 더 흥겨운 시간으로 그 순간을 바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당당함을 함께 느끼게 하는 막강한 에너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제 동서로 멤버들이 쪼개져서 함께 하기가 더 어려워졌겠지만 부디 앞으로도 노래하는 기회를 꼭 만들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 날 필라델피아에선 먹을 수 없다며 캬~를 연발해가며 중국 식당에서 콘지 먹는 모습들을 보고 바로 다음 날 아침에 만들어 보았는데 그 쫀득쫀득하면서도 몰캉한 콘지의 질감이 나더군요. 콘지의 기본이 될 것 같은 레시피를 써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쌀과 국물의 양을 맞추는 것, 그리고 찬국물에 쌀을 넣어 끓을 때까지 저어주는 점일 것 같아요. 오트밀 죽도 찬물에 넣어 저어가면 끓이는 것과 끓는 물에 오트를 넣는 것이랑 맛에 차이가 나거든요. 나머지 재료들은 입맛대로 바꾸면 되겠지요. Congee (bok choy and fish 넣은 콘지)

준비할 재료들

  • 국물 6컵 (야채 국물이나 chicken broth, beef broth등 입에 맞는 국물로 준비)
  • 흰쌀 1컵, 씻어서 물을 뺀다
  • 생강 1조각 (좋아하면 큰 쪽, 싫어하면 쬐끄만 걸로)
  • 파 2쪽 (흰 부분을 한 동강 잘라내고 녹색 부분은 잘게 썰어 둔다)
  • 소금은 간이 맞을 정도
  • Bok Choy, 넣고 싶은 만큼 씻어 썰어 둔다
  • 땅콩 (optional, 굽지 않은 걸 사다가 마른 팬에 중간불에서 고소한 향이 나올 때까지 볶아 사용하면 좋은데 귀찮으면 미리 볶은 걸 사용해도 된다는 말은 하나마나)
  1. 찬 국물에 쌀, 생강, 파의 흰부분, 소금 넣고 끓을 때까지 저어준다.
  2. 끓기 시작하면 낮은 불로 낮춰 뚜껑을 연 체 간간이 저어가며 쌀이 부드럽고 국물이 뻑뻑해 질 때까지(20-25분 정도) 익힌다.
  3. bok choy와 땅콩을 넣고 야채가 살짝 익을 정도로만 계속 젓는다
  4. 마지막에 잘게 썰어둔 파를 넣는다.

한국식 볶은 죽을 좋아하는 편이면 마지막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 뜨리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애.

2008년 11월 21일 금요일

난로 (Wood Stove)/수필

남편의 직장이 옮겨지고 현재 집을 구하기 전 1년 동안 아파트에서 살던 한 해, Thankgiving을 맞아 아리조나에 계시는 시어머님댁을 우리 식구 모두가 방문했다. 피닉스에서도 3-4 시간을 더 걸려 산으로 산으로 가면 해발 6000피트 되는 곳에 Lakeside라는 작은 도시가 나오는데 도시를 피해 산으로 가신 시어머니는 그 곳에 통나무 집을 짓고 사신다. 때는 늦가을이라 이미 온 도시는 두꺼운 눈에 쌓여 찬바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이틀 이상을 꼬박 운전해 온 터라, 그리고 미끄러운 산길들을 조심해서 오느라 지친 우리들은 따뜻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난로 앞에 모이자 한순간 피곤이 사라져 버렸다. 밤중에 혹 우리가 추울새라 두어번 장작들을 더 넣어 주시던 시어머니. 그 때 처음으로 wood stove를 가까이서 접했는데 왜 그리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앞으로 집을 사면 기필코 wood stove를 넣으리라 다짐했다. 

3개월이 지난 다음 해 2월, 짓고 있는 자그마한 새 집을 사면서 다행히도 wood stove를 거실에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나무도 좀 사고 요리조리 불 때는 기술도 익혀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난롯불을 들여다 보고 있던 나의 머릿속에 불현듯 지난 세월들이 지나가는 데 그 회상 속에서 나무타는 향내가 물씬 나는 듯 했다. 그랬다! 나는 이미 그 불꽃의 온도나 모습에 친숙해져 있었는데 그걸 잊고 살아왔던 것이다.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는 맛에 까다로운 분이셨다. 내가 태어나서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살아 온 부산의 초량동 집은 숲처럼 많은 집들이 들어선 동네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엌 부뚜막 위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큰 무쇠 가마솥이 하나 걸려 있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무쇠 뚜껑이 얼마나 무거운 지 내가 한참 클 때까지도 뚜껑을 들 수가 없어 비스듬히 옆으로 밀어 열곤 했다. 끼니 때마다 그 솥에 밥을 짓고 노릿노릿 눌어 붙은 누룽지를 얇게 긁어내어 먹기도 하고 물을 부어 구수한 숭늉을 끓여 먹기도 했다.

7형제 중에서도 여섯째와 9년 떨어져 막내로 자란 나는 무쇠 솥의 온도로 데워진 부뚜막의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나 언니들이 불 때던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 보았었다. 하루는 엄마가 엄청나게 큰, 살아 움직이는 생선을 한 마리 사 오셨는데 가물치라고 하시면서 얼마 전에 해산한 큰 올케의 회복을 돕기 위해 요리할 것이라 하셨다. 유유히 물을 가르며 헤엄치는 그 생선을 들여다보는 것도 톡톡한 구경거리였지만 엄마가 어떻게 요리하실 지가 몹시 궁금했다. 그 이튿날, 내 기억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 그 생선의 최후를 지켜 보게 되었다. 먼저 무쇠 솥에 불을 잔뜩 지펴 아주 뜨겁게 달구신 후 조심스레 뚜껑을 열고 참기름을 한 번 휙 두르시더니 그 살아있는 생선을 재빨리 던져 넣고 뚜껑을 닫아 두 손으로 꼭 눌러 잡고 계신 게 아닌가! 그걸 지켜 보던 나의 가슴이 답답해왔다. 그 생선이 느낄 온도의 고통을 나도 일부 느끼고 있었다. 무서운 힘으로 솥을 쳐대던 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조용해지면서 엄마도 뚜껑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잠시 후 나를 불러 한 그릇 먹어 보라고 권하시는 엄마의 손에는 누리끼리한 빛깔에 기름이 동동 뜨는 한 사발의 생선 곰국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몸서리를 쳤다. 그것을 입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생선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그 후부터 뜨거운 가마솥 속의 가물치를 상상하면 그 뜨거움에 내가 괴로웠고, 그 가마솥을 보면 가물치가 보이는 것 같아 그 솥에다 하는 음식 먹기가 께름칙했다. 이제 생각해보면 고통중에 생선의 몸 속에서 생성되는 호르몬인 아드레날린 때문에 어른들은 보약이 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개도 두들겨 잡아야 맛 있다고 하듯이.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식구는 도시를 벗어나 변두리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마당이 그리 넓지 않은 이층 집었는데 워낙 불 때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께서 대문간 옆에다 시멘트를 발라 아궁이를 만드시고 주물 공장에서 손잡이를 단 쇠문도 하나 주문해다 앞에다 달고 무쇠는 아니지만 큰 솥을 하나 사다 거셨다. 호기심으로 옆에서 들여다 보는 나에게 아버지는 불 지피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불 지필 기회들도 주셨다. 아버지가 뒷산에서 잔뜩 긁어다 놓으신 마른 솔잎을 쏘시개로 해서 쇠문 아래의 불구멍을 돌로 조절해가며 나는 곧 어슬픈 기술자가 되었다. 매일 먹는 밥 뿐만 아니라 세숫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준비되고, 명절이나 제사 때의 음식은 나물에서부터 생선 전까지 모두 군불 아궁이 위에서 마련되었다. 식사하시는 손심들은 다들 우리 집 음식 더 맛있다고들 했지만 나는 그 차이를 맛 볼 수 없었고 오로지 빨리 된다는 편리함에만 감동되었다. 아버지가 땔감과 쏘시개를 미리미리 여유있게 마련해 두셔서 아쉬움 없이 오랫동안 편리함을 누리던 그 집에서 나는 결혼해서 미국으로 오고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강아지 한 마리도.... 

지금 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냄새는 잘 새어나오지 않아 못 맡지만 불길 모양과 온도는 옛날 그대로다. 단지 그 아궁이와는 달리 현재 우리 집 난로는 앞문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불길 모양을 아주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나무 태우는 불길의 모양은 참으로 다양하고 아름답다. 늘 같은 모양과 색깔로 타 오르는 개스 불 모양과는 달리 공기의 양과 장작의 밀도에 따라 항상 다른 모습으로 허울댄다. 색깔도 다양해서 주로 보랏빛 불꽃에서 정금보다 밝고 맑은 황금빛까지 조금씩 다른 명도의 많은 색들을 볼 수 있다. 가끔씩 문을 열 때 새어 나오는 나무타는 향도 은은하다. 화학에 무지한 나에게는 나무가 산소와 함께 타 들어가며 이토록 강렬한 열을 내는 그 자체가 신비다. 

장작의 바깥에 붙어 있는 잔가지들로부터 시작해서 타 들어갈 때 나무 결의 반대 방향으로 곳곳에 골들이 먼저 생기고 조각 조각을 붙인 듯한 모자이크 형태를 잡은 후 거기서부터 깊이 타 들어 가는데 골마다 다른 모양의 잔불들이 파랑개비마냥 나풀거리며 올라온다. 세월이 가면서 깊어지는 인간의 지혜의 골 같기도 하고 해가 다르게 깊어 가는 얼굴의 주름살 같기도 하다. 나무는 혼자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무덩이 한 개만 덜렁 쏘시개 위에 올려 놓으면 부루퉁한 색깔로 마지 못해 억지로 타면서 열도 적게 낼 뿐만 아니라 장작을 제대로 태우지도 않고 꺼저 버릴 때도 많다. 힘겹게 쬐끄만 불꽃 밑에 매달려 타는 장작에게 친구 삼아 몇 조각 나무를 더 넣어주면 금방 생기가 나고 얼마 안 있어 활활 타대는 모습을 보면 나의 조그만 도움으로 장작에게 큰 행복감을 안겨준 듯 해 마음이 뿌듯해지곤 한다. 

한동안 타고 나면 장작은 잿빛 가루를 덮어 쓴 황금으로 변한다. 아니 황금보다는 순수 형광 오렌지색 보석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이름이다. 엷은 보랏빛 불꽃이 느린 속도로 여유있게 피어 오르면서 최대의 열기를 내는 때다. 

미국에서 그럭저럭 23년을 보내고 나니 고향의 동무들과도 점점 연락이 뜸해진다. 내가 떠나 온 빈 자리는 재빨리 메워지고 다들 바쁘게 살고 있으리라. 내 가슴 속에는 떠나 올 때의 그 정다움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그러나 여전히 변치 않는 따뜻함과, 같은 체취와 모습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한 친구! 다들 미국 생활이 외롭다고들 하지만 나의 화로 속에는 정다운 고향 친구가 있다. 바깥이 우중충하니 흐리고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하늘만 가리고 있을 때 나의 벗은 더 밝게 살아나고 그 벗의 따뜻한 포옹에 나는 마냥 일어날 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