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 21일 금요일

난로 (Wood Stove)/수필

남편의 직장이 옮겨지고 현재 집을 구하기 전 1년 동안 아파트에서 살던 한 해, Thankgiving을 맞아 아리조나에 계시는 시어머님댁을 우리 식구 모두가 방문했다. 피닉스에서도 3-4 시간을 더 걸려 산으로 산으로 가면 해발 6000피트 되는 곳에 Lakeside라는 작은 도시가 나오는데 도시를 피해 산으로 가신 시어머니는 그 곳에 통나무 집을 짓고 사신다. 때는 늦가을이라 이미 온 도시는 두꺼운 눈에 쌓여 찬바람을 불어대고 있었다. 이틀 이상을 꼬박 운전해 온 터라, 그리고 미끄러운 산길들을 조심해서 오느라 지친 우리들은 따뜻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난로 앞에 모이자 한순간 피곤이 사라져 버렸다. 밤중에 혹 우리가 추울새라 두어번 장작들을 더 넣어 주시던 시어머니. 그 때 처음으로 wood stove를 가까이서 접했는데 왜 그리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앞으로 집을 사면 기필코 wood stove를 넣으리라 다짐했다. 

3개월이 지난 다음 해 2월, 짓고 있는 자그마한 새 집을 사면서 다행히도 wood stove를 거실에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나무도 좀 사고 요리조리 불 때는 기술도 익혀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난롯불을 들여다 보고 있던 나의 머릿속에 불현듯 지난 세월들이 지나가는 데 그 회상 속에서 나무타는 향내가 물씬 나는 듯 했다. 그랬다! 나는 이미 그 불꽃의 온도나 모습에 친숙해져 있었는데 그걸 잊고 살아왔던 것이다.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는 맛에 까다로운 분이셨다. 내가 태어나서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살아 온 부산의 초량동 집은 숲처럼 많은 집들이 들어선 동네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엌 부뚜막 위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큰 무쇠 가마솥이 하나 걸려 있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무쇠 뚜껑이 얼마나 무거운 지 내가 한참 클 때까지도 뚜껑을 들 수가 없어 비스듬히 옆으로 밀어 열곤 했다. 끼니 때마다 그 솥에 밥을 짓고 노릿노릿 눌어 붙은 누룽지를 얇게 긁어내어 먹기도 하고 물을 부어 구수한 숭늉을 끓여 먹기도 했다.

7형제 중에서도 여섯째와 9년 떨어져 막내로 자란 나는 무쇠 솥의 온도로 데워진 부뚜막의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엄마나 언니들이 불 때던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 보았었다. 하루는 엄마가 엄청나게 큰, 살아 움직이는 생선을 한 마리 사 오셨는데 가물치라고 하시면서 얼마 전에 해산한 큰 올케의 회복을 돕기 위해 요리할 것이라 하셨다. 유유히 물을 가르며 헤엄치는 그 생선을 들여다보는 것도 톡톡한 구경거리였지만 엄마가 어떻게 요리하실 지가 몹시 궁금했다. 그 이튿날, 내 기억에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 그 생선의 최후를 지켜 보게 되었다. 먼저 무쇠 솥에 불을 잔뜩 지펴 아주 뜨겁게 달구신 후 조심스레 뚜껑을 열고 참기름을 한 번 휙 두르시더니 그 살아있는 생선을 재빨리 던져 넣고 뚜껑을 닫아 두 손으로 꼭 눌러 잡고 계신 게 아닌가! 그걸 지켜 보던 나의 가슴이 답답해왔다. 그 생선이 느낄 온도의 고통을 나도 일부 느끼고 있었다. 무서운 힘으로 솥을 쳐대던 소리가 점점 약해지고 조용해지면서 엄마도 뚜껑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잠시 후 나를 불러 한 그릇 먹어 보라고 권하시는 엄마의 손에는 누리끼리한 빛깔에 기름이 동동 뜨는 한 사발의 생선 곰국이 들려져 있었다. 나는 몸서리를 쳤다. 그것을 입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생선이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그 후부터 뜨거운 가마솥 속의 가물치를 상상하면 그 뜨거움에 내가 괴로웠고, 그 가마솥을 보면 가물치가 보이는 것 같아 그 솥에다 하는 음식 먹기가 께름칙했다. 이제 생각해보면 고통중에 생선의 몸 속에서 생성되는 호르몬인 아드레날린 때문에 어른들은 보약이 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개도 두들겨 잡아야 맛 있다고 하듯이.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식구는 도시를 벗어나 변두리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마당이 그리 넓지 않은 이층 집었는데 워낙 불 때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께서 대문간 옆에다 시멘트를 발라 아궁이를 만드시고 주물 공장에서 손잡이를 단 쇠문도 하나 주문해다 앞에다 달고 무쇠는 아니지만 큰 솥을 하나 사다 거셨다. 호기심으로 옆에서 들여다 보는 나에게 아버지는 불 지피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불 지필 기회들도 주셨다. 아버지가 뒷산에서 잔뜩 긁어다 놓으신 마른 솔잎을 쏘시개로 해서 쇠문 아래의 불구멍을 돌로 조절해가며 나는 곧 어슬픈 기술자가 되었다. 매일 먹는 밥 뿐만 아니라 세숫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준비되고, 명절이나 제사 때의 음식은 나물에서부터 생선 전까지 모두 군불 아궁이 위에서 마련되었다. 식사하시는 손심들은 다들 우리 집 음식 더 맛있다고들 했지만 나는 그 차이를 맛 볼 수 없었고 오로지 빨리 된다는 편리함에만 감동되었다. 아버지가 땔감과 쏘시개를 미리미리 여유있게 마련해 두셔서 아쉬움 없이 오랫동안 편리함을 누리던 그 집에서 나는 결혼해서 미국으로 오고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강아지 한 마리도.... 

지금 난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냄새는 잘 새어나오지 않아 못 맡지만 불길 모양과 온도는 옛날 그대로다. 단지 그 아궁이와는 달리 현재 우리 집 난로는 앞문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불길 모양을 아주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나무 태우는 불길의 모양은 참으로 다양하고 아름답다. 늘 같은 모양과 색깔로 타 오르는 개스 불 모양과는 달리 공기의 양과 장작의 밀도에 따라 항상 다른 모습으로 허울댄다. 색깔도 다양해서 주로 보랏빛 불꽃에서 정금보다 밝고 맑은 황금빛까지 조금씩 다른 명도의 많은 색들을 볼 수 있다. 가끔씩 문을 열 때 새어 나오는 나무타는 향도 은은하다. 화학에 무지한 나에게는 나무가 산소와 함께 타 들어가며 이토록 강렬한 열을 내는 그 자체가 신비다. 

장작의 바깥에 붙어 있는 잔가지들로부터 시작해서 타 들어갈 때 나무 결의 반대 방향으로 곳곳에 골들이 먼저 생기고 조각 조각을 붙인 듯한 모자이크 형태를 잡은 후 거기서부터 깊이 타 들어 가는데 골마다 다른 모양의 잔불들이 파랑개비마냥 나풀거리며 올라온다. 세월이 가면서 깊어지는 인간의 지혜의 골 같기도 하고 해가 다르게 깊어 가는 얼굴의 주름살 같기도 하다. 나무는 혼자 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무덩이 한 개만 덜렁 쏘시개 위에 올려 놓으면 부루퉁한 색깔로 마지 못해 억지로 타면서 열도 적게 낼 뿐만 아니라 장작을 제대로 태우지도 않고 꺼저 버릴 때도 많다. 힘겹게 쬐끄만 불꽃 밑에 매달려 타는 장작에게 친구 삼아 몇 조각 나무를 더 넣어주면 금방 생기가 나고 얼마 안 있어 활활 타대는 모습을 보면 나의 조그만 도움으로 장작에게 큰 행복감을 안겨준 듯 해 마음이 뿌듯해지곤 한다. 

한동안 타고 나면 장작은 잿빛 가루를 덮어 쓴 황금으로 변한다. 아니 황금보다는 순수 형광 오렌지색 보석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이름이다. 엷은 보랏빛 불꽃이 느린 속도로 여유있게 피어 오르면서 최대의 열기를 내는 때다. 

미국에서 그럭저럭 23년을 보내고 나니 고향의 동무들과도 점점 연락이 뜸해진다. 내가 떠나 온 빈 자리는 재빨리 메워지고 다들 바쁘게 살고 있으리라. 내 가슴 속에는 떠나 올 때의 그 정다움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그러나 여전히 변치 않는 따뜻함과, 같은 체취와 모습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한 친구! 다들 미국 생활이 외롭다고들 하지만 나의 화로 속에는 정다운 고향 친구가 있다. 바깥이 우중충하니 흐리고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하늘만 가리고 있을 때 나의 벗은 더 밝게 살아나고 그 벗의 따뜻한 포옹에 나는 마냥 일어날 줄을 모른다.